구본창 《구본창의 항해》





Ocean 08-1, 2002 ⓒ구본창







존재와 시간의 서사
구본창의 사진은 인간의 감각으로 감지하기 어려운 시간의 축적을 담은 존재에 대한 서사이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이나 생명의 몸체에는 각자 겪은 시간이 쌓여간다. 시간은 존재의 몸과 내면에 표 안 나게 스며든다. 서서히 쌓인 시간은 존재 자체가 된다. 그의 <인테리어>(1998-2015)는 사물이 빠져나간 텅 빈 차고와 상자를 재현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 담백해 보이는 백색조의 사진에서 공간은 알 수 없는 기운과 미세한 존재들로 꽉 차 있는 듯 느껴진다. 사물도 인간도 떠난 공간 구석에 내려앉은 먼지, 벽과 바닥의 얼룩들이 그 안에 쌓여있는 시간을 증명한다. 구본창의 이 작업은 흐르는 시간을 응축하여 재현하는 사진의 매체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본창의 <백자>(2004-현재) 역시 시간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지속해서 흘러가고 있음을 응축된 시간을 통해 일깨운다. 백색조의 빈 공간과 빈 그릇 사진으로 채워진 전시장에서 응축된 시간은 작은 초침 소리처럼 풀어지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사진이 시간을 정지하여 대상을 박제한다고 하지만, 구본창의 사진은 그 박제의 과정에서 복수의 시간을 겹치고 그 시간 속에 관람자가 엉켜 들어가게 한다. 그의 사진에는 피사체의 시간과 사진가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 이 두 존재가 겪는 각기 다른 시간의 이중주를 드러내는 것은 구본창 사진이 갖는 특징이다. 그의 어떤 사진에서도 피사체는 사진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의 존재와 사진가의 존재가 공존하는 그 시간, 사진가가 카메라를 들고 행하는 밀고 당기기가 자아낸 묘한 긴장의 기류가 구본창의 사진에서 풍긴다. 그리고 거기에 개입하는 감상자의 시간이 얹힌다. 이 대상과 사진가, 감상자의 시간의 삼중주는 (2010-2019)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사진은 한 노모가 간직하고 있는 사망한 아들, 병사의 유품을 촬영한 것이다. 철모를 뚫고 들어온 총알 자국, 뿌연 안경알, 해진 벨트와 신발, 줄이 끊어진 시계, 군인 인식표, 그의 몸에 차고 다녔을 수류탄,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낡고 녹슬어 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은 구본창의 사진은 사지로 내몰린 병사의 처절한 시간과 그 유품을 간직해 온 어머니의 고통의 시간을 재현한다. 그런데 그는 그 유품이 일으키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듯 한 점씩 회색 배경과 회색 액자 속 정중앙에 배치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너덜너덜한 신발마저도 범접하지 못할 정갈한 오브제로 장식장에 담아 넣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는 병사의 시간과 손때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극명한 리얼리즘을 구사하고, 동시에 그의 유품을 증거품이 아닌 제의의 사물로 만들려는 듯 죽음의 순간을 방부 처리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킨다. 마치 무중력의 상태에 있는 듯 정갈하고 아름답게 구성된 이 절박한 시간의 증표들 앞에서 감상자는 비극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 사이를 먹먹히 부유한다.        








 



사진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진은 복제가 가능한 매체이며, 벤야민에 의하면 다수로 복제 가능할 때 예술의 아우라는 빠져나간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구본창의 오브제 사진이 다수로 복제되어 유포된들, 복제된 개개의 사진이 주는 감상이 약화할까.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는 전통 속에 계승되어온 예술개념과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이 아우라는 하나가 여럿으로 복제되는 물리적 상황에서 붕괴한다. 벤야민은 이를 ‘거리’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우라는 단 하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거리’이다. 사진이 복제 가능하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와 그 물질적인 거리를 없애는 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제 매체로 제작된 구본창의 사진은 감상자와의 거리를 좀체 좁히지 않는다. 그의 백자 사진이 열 개로 복제되었다 치면 그 열 개는 하나같이 각자의 공간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고유의 아우라를 방사할 것이다. 이를 사진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제3의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가의 존재이다. 구본창의 사진과 감상자의 거리가 좀체 좁혀지지 않으며 아우라를 풍기는 근본 원인은 사진가와 대상 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구본창식의 대상화에 있다. 그의 사진은 대상에 빠져들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만큼이나 대상과의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를 생성하는 것은 구본창만의 정교한 미감이다. 이 미학은 사물 사진이 사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구본창의 예술가적 태도에서 나온다.

사진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이중주야말로 구본창 예술의 특징이다. 극명한 정치예술을 논한 랑시에르가 예시로 든 작품은 하나같이 사유를 촉발하는 것들이다. 그는 정치적 사유는 결국 미학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사유도 미학적 체제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사유의 공간이 존재하는 예술작품은 랑시에르 예술론의 전제이다. 구본창은 <아! 대한민국>(1992-1993) 등 여러 시리즈에서 한국 사회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왔지만 단 한 번도 극명한 정치적 표현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은 구본창의 포토몽타주와 콜라주 실험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포토몽타주는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이 정치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포토몽타주 역시 명확한 반전 정치 메시지를 담았다. 랑시에르는 이질적인 것을 조합하는 포토몽타주를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형식으로 보았다. 이것을 발견할 수 있는 해석적 틀인 미학적 체제, 특히 제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경험이 단절되는 가운데 그 사유는 공간의 문을 열고 감상자에게 다가간다. 구본창의 <아! 대한민국>은 한국 사회와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기호들과 스냅사진을 엮은 실험적인 포토몽타주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문으로 오려 한반도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당시 정치 상황을 담은 세 장의 스냅사진을 넣어 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국기가 중앙에 들어간 이 작업에서도 직설적인 어법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미학적 장치를 구사함으로써 감상자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차단한다. 한반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은 스냅사진은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로 암시의 단계에 머물도록 조절되었다. 이러한 구본창의 미학적 장치는 한국 사회에 대해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감상자의 공간을 더 확장한다.




 
구본창의 작품에 미학적 사유의 공간은 그 형식과 강도에 있어서 변화를 겪어왔다. 그의 작가로서의 여정에서 예술이라는 개념은 일관되게 자리하지만, 예술에 관한 생각과 표현 특징은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는다. 예술을 동경하고 갈망하며 예술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던 초기의 풋풋한 그림들에는 간결한 구성과 감성적인 색채와 선이 돋보인다. 독일 유학 시절에는 다양한 기초조형 수업의 영향 때문인지 그에게 내재한 조형감각이나 색채감각이 사진에 발현되며 시리즈 구성으로 네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85년 귀국과 함께 그는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수행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과 한국의 미술 현장이 괴리가 큰 만큼 그는 더욱더 사진으로 현대미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더 거칠게 도전한다. 포토그램이나 포토몽타주 등 갖가지 사진 기법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몸으로 수행하고, 오리고, 구성하고, 꿰매고, 흘리고, 강렬한 색을 입히고, 오브제를 찾아내고, 평면을 벗어나 바닥에 설치하고, 사진의 범위를 넘어선 다양한 매체 실험을 감행한다. 이 시기 그는 철저하게 예술가의 태도로 사진에 접근했음을 볼 수 있다.







 
오브제의 재탄생
실험정신을 가지고 몸으로 예술을 수행하는 격동의 시기를 거쳐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숨>(1995)을 기점으로 그는 점차 관조의 미학을 향해간다. 이전에는 대상과 자신의 거리를 두면서도 결국은 한 몸이 되어 부대끼며 예술성에 치중한 미학적 요소를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면, 이 시기 그의 작업에서는 대상과 차분한 거리두기가 눈에 띈다. 이와 함께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시간 개념도 더 넓어지고 깊고 세밀해진다. 구본창은 한 인터뷰에서 사진 작업은 “어려서 경험한 영상을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어릴 적 작은 사물 존재들과 대화한 기억은 오브제를 촬영한 작업에 섬세한 감각과 울림으로 나타난다. 대상에 주목하는 그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태도와 예술가의 태도가 균형을 이루고, 관조적이고 정적인 고요는 철저한 사진 미학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구본창은 인간의 사용을 통해 사라지는 운명을 타고나 쓰임새를 다하고 소멸하기 직전의 비누 조각에 온전히 주목한다.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가 가질법한 대상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은 비누를 오롯이 조명하여 무대 위에 올려놓은 <비누>(2004-현재)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일상의 비누는 대상에 몰입하는 사진가의 예리한 눈길을 통해 그 형태와 색채, 말라 갈라진 결조차도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조각된 오브제로 탈바꿈한다. 이 작업은 인간의 수많은 손길이 스쳐 지나갔을 비누의 시간을 동영상처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촉각적인 사진이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 <백자>와 <황금>은 예술가의 아카이브 충동의 발현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백자>는 본연의 자리에 있어야 할 유출된 문화재를 세계 곳곳에서 찾아 기록한다는 점에서 아카이브 작업이다. 그러나 유출된 문화재의 사진기록은 정보로서 공개되어 있고 굳이 예술가가 기록을 목적으로 촬영할 필요는 없다. 이 작업에서 백자는 예술가의 해석적인 아카이브 방식을 통해 재탄생한다. 도공의 절제된 표현을 통해 탄생한 백자가 고향과 타지에서 숨 쉬어온 시간, 자신과의 만남을 기다려온 사진가에게 갈라지고 긁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백자에 얹어지고, 백자는 미학적 오브제로 거듭난다. 구본창이 오랜 기다림을 통해 만난 백자에 예술적 숨결을 입힌 순간, 하나밖에 없던 백자는 특유의 아우라를 가진 여러 점의 백자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경주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던 금 장신구들은 구본창의 사진을 통해 또 다른 불멸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미학화된 그의 오브제 작업에서 관객에서 가장 유혹적으로 말을 거는 것은 바로 <황금>(2016-현재)이다. 구본창의 사물 사진은 대체로 정적이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 황금 유물들은 꾸물거리며 발광한다. 1500년 전 당시 이들이 실제 가지고 있던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 매력을 뿜어내고 싶다는 그의 말은 마치 마술사의 말처럼 들린다. 그의 의도에 따라 매혹적으로 표현된 황금 장신구는 우리의 권세와 물욕에 대한 페티시를 자극한다. 그는 강한 콘트라스트와 역동적인 배경, 조명 효과를 더하여 부질없고 덧없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 들어가는 인간 욕망의 종착역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유혹적인 모습에 빠져드는 감상자는 생전의 부귀와 권력,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바니타스의 교훈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경험한다.

구본창의 작업은 시종일관 예술가의 태도를 유지해온 사진가의 삶을 보여준다.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오로지 한길에만 매진해 온 사람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가 살아온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보여준다. 정교한 이미지 조율자로 알려진 구본창은 예술에서 넉넉한 자유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고 관람자를 사유의 공간으로 인도하며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





구본창 작가 인터뷰
우회하고 충돌하고 전진하는 구본창의 항해일지


인터뷰어 | 김소희 뮤지엄한미연구소 학예연구관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처음으로 개최되는 공립 미술관 개인전이자 지금까지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돌아보는 대규모 전시인데 그 구성이 궁금하다.
40년이 넘는 작품 활동을 풀어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희진 큐레이터와 꾸준히 의견을 나누고 또 조율해 가면서 16개의 공간으로 나누었는데, 마치 16개의 전시를 동시다발로 여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주제별로 묶을까 했는데 주제가 곧 내 작품 활동에 따른 시간의 흐름이기도 했다. 내 인생관과 경험이 바뀌는 시기에 따라서 주제도 거기에 맞게 발전해 나간 것이다. 그렇게 43개의 시리즈로 정리했고 크게는 실험적인 시기, 자연과의 동화의 시기, 문화로 관심을 집중한 시기의 세 가지 카테고리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으로 나누었다.*
작품 500여 점 중에서 반 정도는 새롭게 제작하지만, 나머지는 기존의 작품으로 전시한다. 톤이 좀 안 맞고 어딘가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 사진 그대로 보여주자 했다. 그래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과 관련된 부분들은 아카이브 자료로 보여줄 예정이다. 그리고 패션, 영화 등 대중문화와 관련된 사진들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쇼케이스에서 자료로 보충할 예정이다.

40여 년의 연보를 돌아보는 자리에서 그 시작점부터 살펴보자면, 구본창 사진의 태동은 언제인가?
독일 함부르크 유학 시절 용기를 내서 겔프케(André Gelpke)에게 전화했다. 작품에 대한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일면식도 없었는데 무작정 연락을 취했다. 겔프케는 유학생활의 이국적 정취를 스트레이트(straight)하게 찍은 내 사진들에는 나만의 특색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해주었다. 그때 이후로 바뀐 거다. 겔프케나 학교 교수들이 오토 슈타이너트(Otto Steinert) 제자들이었고 나도 대상물을 바라보는 방법에 있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겔프케와의 만남 이후 본격적으로 구본창의 작품이 나타났다. 시기별로 주제가 다양해지는데, 작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면 무엇인가?
겔프케의 조언을 듣고 나만의 스토리,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느끼고 만든 것이  〈1분간의 독백〉 시리즈이다. 독일에서 한 작품인데 4장의 사진을 하나의 스토리로 묶었다. 이후 <탈의기> 등 치열하게 여러 다양한 기법들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죽음이 또 다른 터닝포이트가 되었다. 1~2년 방황하다가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전까지의 강렬하고 파격적인 실험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강렬하지 않지만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새롭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나온 작품이 <시간의 그림> 시리즈이다. 명상적인 작품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는데 나도 나이가 점차 들어가니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까지 다른 작가가 하지 않았던 사진적인 방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고심했다. 그러면서 탈, 백자, 황금 유물 시리즈로 이어진 것이다.

구본창의 연보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1988년 첫 기획전인 《사진·새시좌(視座)》(워커힐미술관, 1988.5.18-1988.6.17)전이다. 필름을 자른 형상의 도록 표지가 눈에 띄는데, 처음으로 현대미술의 본류인 미술관에서 사진기획전이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진사에 이정표를 세운 전시다. 전시 기획에 대해서 말한다면?
디자인은 당시에 알게 된 정병규 선생님이 맡아 포스터도 그렇고 도록 디자인을 잘 해주셨다. 〈탈의기〉는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고 프린트 한 사진이다. 그때 김대수 씨 작품도 사진 위에 스크래치를 냈다. 이규철 씨도 고명근 씨 이전에 사진입체를 만들어 보였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기법들이었고 다들 프린트 크기도 컸다. 그래서 ‘만드는 사진’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스트레이트 한 사진들도 있었다. 최광호 씨는 하루에 찍은 사진들을 컨셉추얼하게 보여주었고 한옥란 씨는 연출된 정물사진을 발표했는데 당시로써는 드문 시도였다. 다들 사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나는 당시 한국 사진이 보여주던 것 외에 사진에 다른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워커힐미술관 고문이자 전시를 담당했던 홍사중 선생님을 소개받게 되었고 사진전에 대해 설명 할 기회를 얻었다. 세계적으로는 사진이 현대미술에서 막 부상하던 시기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진이 새로운 물결이고 아직 한국에는 소개된 적이 없다고 설득했는데 그분이 귀담아들어 주었고 전시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현대미술에서 사진이 중요한 매체로서 부상하는 시기는 언제이고 그 계기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1993년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휘트니 전시에는 회화를 훨씬 뛰어넘는 양의 사진과 비디오를 선보였고 여기서 국내 큐레이터들이 놀란 거다. 1996년 과천에서 한국 현대사진전인 《사진-새로운 시각》전이 이루어진 것은 그 영향이 크게 미쳤다고 본다. 워커힐미술관은 사립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앞서서 사진전을 열게 된 것이지만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립 미술관에서도 서서히 사진전을 수용하게 되었다. 1990년대 확장된 사진의 경향을 보여주었던 《사진의 수평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 전시가 열리면서 사진학과에서 다양한 기법의 사진 붐이 일었다.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기획자의 역할 역시 구본창 연보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기획자로서 중요한 계기가 된 전시가 있다면?   
2000년 미국 휴스턴의 포토페스트(FotoFest)에서 열린 《동시대 한국사진가들(Contemporary Korea Photographers)》전이 한국 작가들이 정식으로 해외에 알려진 계기를 마련했다. 이 전시 이후에 작가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덴마크와 시드니에서 한국 현대사진작가 초대전이 연이어 열렸고, 그때부터 휴스턴미술관의 사진부 칩(chief) 큐레이터였던 앤 터커(Anne Tucker)가 한국사진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2009년도 《케오틱 하모니: 동시대 한국사진(Chaotic Harmony: Contemporary Korean Photography)》전을 열게 되었다. 2000년도에 휴스턴 포토페스트를 다녀와서 보니 전 세계적으로 큰 도시마다 포토페스티벌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한성필, 박형근 등 한국 학생들이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각 페스티벌, 포트폴리오 리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면서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해외 진출에 대한 터를 그때 닦은 것이다. 휴스턴 전시를 기점으로 이정진 씨도 해외 교류를 하면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2008년 대구사진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으면서 포트폴리오 리뷰 체제를 처음 도입하게 되었다.  

구본창의 창작 활동의 시작이자 지속의 힘은 사진이다. 사진이란 어떤 의미인가?
사진은 내 삶의 의미, 내 존재의 의미다. 독일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는 사진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현실의 장면이나 이미지를 렌즈에 담으면 그것은 바로 내 것이 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독일 유학 당시에 교수들, 학생들이 내 사진을 인정해주었고 그때 스스로 확신이 생겼던 것 같다. 사진은 내가 세상에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을 사진을 통해서 얻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 미래가 바로 고속도로처럼 뚫렸던 건 아니었다. 나도 부딪히고 서바이벌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안의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이번 전시에서 43개의 시리즈를 보여주는데 돌아보면 각 시리즈를 작업할 때마다 시행착오도 수없이 거쳤고 주변의 조수들, 친구들, 작가들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솎아내는 과정을 거쳤다. 내 마음에 들 때까지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대치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엄청나게 키워왔던 것은 사실이다. 인생에 100%란 없고 언제까지나 완벽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그걸 깨달았으니 최선으로 노력할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시는 분들의 기대치에 맞게 보여드리는 게 내 숙제라고 생각한다. 구본창이라는 기대치에 만족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할 것이다.



 






 
한희진 큐레이터 인터뷰
구본창이라는 항로의 발견

인터뷰어 이소민 객원기자


《구본창의 항해》는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됐나?
‘구본창’이라는 인물은 일반인도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 일면만 보고 대부분 ‘정적이고, 감성적 또는 감각적이다’라는 말로 구본창이라는 인물마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그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한 결과,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취적이고, 부단히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으며,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0년대만 해도 유학을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어려운 시기에 그는 예술을 배우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이처럼 끝없이 도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에서 ‘청년’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서 ‘항해’라는 키워드가 바로 떠올랐다. 즉, 《구본창의 항해》를 통해 구본창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

지금의 시기에 구본창 작가의 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구본창 작가는 1988년에 작가가 아닌 기획자로 워커힐 미술관에서 《사진, 새 시좌》전을 기획한 바 있다. 이 전시는 한국 사진계, 그리고 미술계까지 큰 영향을 미쳤던 전시이다. 사진이 가진 주요 속성인 기록의 역할을 뛰어넘어, 타 매체와 같이 주관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시 말해, 사진이 기존의 역할과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표방했던 전시였으며, 이로 인해 사진이 현대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처럼 구본창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현대 사진의 발전을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2024년에는 도봉구 창동에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을 개관한다. 이에, 구본창 작가의 이번 전시를 통해서 사진미술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구본창의 항해》를 기획하게 됐다.

전시 준비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하다.
2022년 3월에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를, 2023년 6월부터는 남서울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로 《영원한 집》을 개최했다. 2개의 전시가 연달아 있었기에 이번 전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작년부터 틈틈이 준비해 왔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전시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작년부터 준비한 기간을 센다면 거의 1년을 준비한 것이다.
1년 만에 준비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구본창 작가가 대부분의 자료를 잘 아카이빙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가 탄탄하게 구성될 수 있었던 바탕이기도 하다. 모든 자료가 거의 다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작품 정리도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권진규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이 점은 구본창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역점으로 두었던 점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자료가 있을 때, 작가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이번 전시에도 적용했다. 구본창 작가는 올해로 70세를 맞이했는데, 청소년기 습작부터 전 세계를 다니며 수많은 전시를 했던 자료 등 2023년까지 자료를 거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간의 자료를 토대로 연보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연보에는 한국 사진의 발전 과정, 해외 진출의 과정 등을 모두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구본창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중점적으로 볼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서울시립미술관은 1층 면적과 2, 3층을 더한 면적이 같다. 개인전으로는 최초로 1층과 2층을 다 사용해 가장 큰 개인전이 될 것이다. 또한 구본창 작가의 작품 시리즈만 50여 개가 있는데, 그중에 43개의 시리즈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으며, 작품이 500여 점, 자료가 600여 점 정도 된다. 이렇게 작품과 자료가 나란히 병치되어 가는 구성이다. 기존의 전시와는 다르게, 이번 전시는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왜 이러한 작품이 탄생하게 됐는가를 알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점적으로 볼 점은 전시의 구성이다. 정말 기대해도 좋다.

전시는 ‘호기심의 방’에서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린 방’으로 구성돼 있다. 5개 방을 차례대로 소개한다면?
먼저 ‘호기심의 방’에서는 작업에 앞서 작가가 수집한 것들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다 준 브로슈어, 그간 모은 레코드, 가구 등 작가의 관심을 끌었던 수집품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의 작업이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볼 수 있으며, 이에 맞춰 구본창의 항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집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아마 이 방에서만 30분은 넘게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전시 도중 호기심의 방 일부는 두 번 정도 변화가 있을 예정이다. 보여줄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모험의 여정’ 방은 독일 유학 시절의 작업 위주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1분간의 독백>이라는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졸업을 앞두고 작업에 대한 갈증을 느낄 당시 우연히 독일의 유명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를 만나, 그로부터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라’라는 비평을 받고, 그간 촬영했던 이미지를 재구성해 탄생한 작품이다. 그리고 졸업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무렵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으로 엄청난 개발이 이뤄지던 시기인데, 더불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간의 스트레이트적인 사진을 탈피해보고자 《사진 새 시좌》전에서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어 보고, 색채도 해보는 등 실험적인 방법을 시도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하나의 세계’ 방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으로 떠난 그는 절에서 수북이 쌓인 먼지를 보면서 ‘시간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나아가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동양철학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자연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여 하나의 순환 관계를 갖기 때문에 끝이 없이 계속 돌아가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라는 방을 기획하게 되었다.
네 번째 방 ‘영혼의 사원’에서는 ‘탈’, ‘백자’ 등과 같은 전통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백자 작업의 경우 인사동에서 진품이 아닌 것으로 연습 촬영을 통해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어 내고, 진품을 찾아 다니며 촬영했기에 엄청난 노고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는 만든 사람, 쓰는 사람,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다 담아 “영혼의 사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
마지막 ‘열린 방’에서는 아직 작가의 항해가 끝나지 않았고, 나이가 많아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기획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유독 눈길이 갔던 작업 또는 의미가 깊게 다가왔던 작업에 대해 말한다면?
앞서 잠시 언급했던 <1분간의 독백>을 꼽고 싶다. 그는 독일 유학 당시 방학 때마다 구두에 속지를 끼우는 아르바이트나 촬영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아 여행을 갔다. 여행에서 촬영한 작업을 안드레 겔프케에게 보여줬는데, 그는 너무 잘 찍었지만, 유럽인이 촬영했는지, 너가 촬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으라는 비평을 통해 작업을 발전시킨다. 보통 촬영한 작업물에서 A컷과 B컷을 골라내는데, 구본창 작가는 일부러 B컷만을 모아 4개로 구성한다. 또한 4컷으로 구성한 이유는, 과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4라는 숫자를 많이 본 기억을 회상하며, 4라는 숫자에 불길한 예감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방인으로서의 삶’이라는 하나의 영화같은 스토리를 만든 것이다. 이 점이 가장 참신하다고 생각했으며, 진정한 작가가 되는 시점이었다고 본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구본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면서 느꼈던 ‘구본창’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타고난 소질이 있는 작가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그 기저에는 자신만의 일관된 생각이 있다. ‘시간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파생된 시리즈들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감각적인 작업을 펼치는 것이 아닌, 주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탐구는 물론, 많은 자료을 수집하고 공부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래서 제목 그대로 “항해”인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신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진가라 생각한다.




 


글 이필 미술사/미술비평
해당 기사는 2023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