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철 《기억연변》 | 기억의 연변, 연변의 기록

역사 속에서 살면서도 역사를 감각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의 시간뿐 아니라 과거 시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개인으로서 존재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한미사진미술관의 작가지원 프로그램 “젊은 사진가 포트폴리오”의 2021년 개인전 작가로 선정된 심학철의 《기억연변》(한미사진미술관 삼청별관, 4.9~6.6)은 한민족으로서 오늘날 한국인의 동포이자 중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연변 조선족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대 연변 조선족의 생활과 환경에 대한 충실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인에게 익숙한 모습을 통해 한민족의 흩어진 역사를 일깨우고, 낯선 모습을 통해 한반도의 지난한 역사를 감각하게 한다.
 


연길시 의란진, 2009 ⓒ심학철


연길시 흥안향 노인활동실, 2002 ⓒ심학철


개인의 기억, 내부인의 기록
심학철은 2000년 무렵부터 고향인 중국 길림성 동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 용정, 도문, 훈춘, 화룡 등지에서 거리 풍경과 가옥의 내외부, 지역사회 행사와 가족의 대소사 등 조선족의 현지 생활과 인물들을 촬영하며,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했다. 대표 작품 시리즈로는 <간판이 있는 연변 풍경>, <초가가 있는 풍경>, <경계의 땅 두만강>, <기억연변> 등이 있다. 그리고 2013년에 한국으로 이주해 노동하며 산업현장과 동료들을 기록하는 <이방인> 시리즈를 진행하고, 가족이 사는 연변을 오가며 <기억연변> 시리즈를 지속하고 있다.

낯설고 새로운 곳이 아닌 익숙한 삶의 일상에서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기록으로 사진에 접근하는 심학철의 작품은 그만큼 핍진한 현실을 보여준다. <기억연변> 시리즈 또한 이방인이 아닌 그 스스로 조선족인 내부인의 시선으로 연변의 사회와 문화를 기록했다. 조선족의 인물과 생활상이 역사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정제된 형식으로 드러나는 한편 개인의 기억이 밴 내밀한 시선이 혼재한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함경도 단천에서 연변으로 이주한 조부모에게서 들은 조선의 이야기, 부모 세대가 경험한 중국의 국공내전과 사회주의 정부 수립(1949년),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설립(1952년, 1955년 자치주로 개정)과 1966~76년 문화대혁명의 그림자, 이후 개혁개방의 물결 등이 스민 기억들이다.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1980년대 서구문화의 대거 유입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발전, 1990년대 본격적인 한국과의 교류와 한국으로의 노동이주 등을 몸소 체험한 심학철은 2000년을 전후해 급속히 변해가는 조선족의 사회문화를 목격하고 촬영해갔다. 연변 지역에서 감소하는 조선족의 수와 사라져가는 전통과 문화,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한 민족 정체성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래서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장기간 진행해 선보인 《기억연변》은 이주와 경계의 역사로서 연변 조선족의 삶을 사회문화적으로 기록한 역사의 초상이자, 점차 상실해가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애잔한 정서를 품은 기억의 초상이다.



조양천진 태동촌, 조선전쟁에 참가했던 군인, 2004 ⓒ심학철


화룡시 서성진 상점 안 풍경, 2005 ⓒ심학철


<기억연변>, 역사의 초상
<기억연변> 시리즈의 작품 한 장 한 장은 언뜻 보면 기념사진의 형식으로 조선족의 오늘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작가가 정교하게 포착한 조선족 이주의 역사와 삶의 자취가 촘촘히 중첩돼 있다. 이를테면 작품 ‘연길시 의란진’(2009)은 겨울철 벼의 그루터기만 남은 논 위에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목도리를 머리에까지 둘러쓴 노인의 초상이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농민들이 가난과 배고픔에 간도(연변 지역 포함)로 월경 이주해 억척스럽게 불모지와 습지를 밭과 논으로 개간하고,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또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강제집단이주 정책으로 쫓겨 와 혹독하게 삶의 터전을 일구며 벼농사를 보편화한 조선족의 역사를 드러낸다. 작가는 개척민으로서 조선족의 역사를 재연하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현장에 참여해 일제강점기 이주 1세대로서 83세 노인을 촬영함으로써 조선족의 선조를 상징화했다.

한편 작품 ‘연길시 흥안향 노인활동실’(2002)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사회주의 체제 아래의 연변 사회를 함축하고 있다. 8월 15일에 열린 노인절 경로행사에서 남녀 각 6명의 노인은 양손에 화려한 조화를 들고, 유교식으로 남녀를 구별해 기념사진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p.97) 그들의 미소 뒤로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창시한 독일의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그 후계자인 러시아의 레닌(Vladimir Il’ich Lenin)과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근엄한 얼굴이 일렬로 나타난다. 또 법제화돼 조선어(북한어)와 중국어 병기로 쓰인 ‘건강쾌락장수’와 ‘단결우애리해’ 그리고 좌측에 ‘서로 격려하자’는 ‘호상고려(互相鼓勵)’가 쓰인 상장기가 붉은 구호를 외치고, 그사이에 매달린 달력사진에는 서양의 새빨간 고급 스포츠카가 번쩍인다.

작품 ‘조양천진 태동촌’(2004)은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조국을 지키자.”라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을 기치로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에 편입해 싸운 조선족 노인의 초상이다. 중국의 인민복을 입고 가슴에 여러 훈장을 단 노인의 뒤편 나무 문짝에는 우연찮게 좌우로, 조선의 한복을 입은 여성과 중국의 군복을 입은 여성의 빛바랜 사진이 찢긴 채 붙어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손 그리고 오래된 사진과 시계의 세월 속에 묻히고, 일상의 개켜진 낡은 이부자리가 노인의 옆을 지키고 있어 한민족의 슬픈 역사를 처연하게 한다.



화룡시 두도진, 2004 ⓒ심학철


연길인민공원, 2018 ⓒ심학철


<기억연변>, 기억의 초상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에서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동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와 맞닿아 있다. 연변의 조선족은 이러한 국경의 지정학적 위치와 소수민족으로서 경계에 있는 주변부 문화로서 급변해왔다.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 및 개혁개방 정책의 여파와 1990년대 한국문화의 본격적인 전파는 조선족의 사회문화에 큰 변화로서 삶 깊숙이 침투했다. <기억연변>에는 그 흔적들이 작가의 머릿속 기억처럼 산재하는데, 작품 ‘화룡시 서성진 상점 안 풍경’(2005)은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작가의 기억을 한 장의 사진에서 단적으로 보여준다.

벽면에는 마오쩌둥(毛澤東) 선집을 든 군인들과 마르크스, 레닌, 소설가 마오둔(茅盾)의 사회주의 서적의 그림과 함께 “열심히 학습해 마르크스 사상을 통달하자.”는 구호가 중국어로만 쓰여 있다. 1966~1976년 불어 닥친 반봉건, 반 지방민족주의의 극좌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의 상흔으로 당시 파괴된 조선족의 전통문화, 수난당한 민족지도자와 민족교육을 상기시킨다. 벽면의 다른 한편에는 중국어로 ‘의약’이라 쓰고 녹용과 인삼주를 광고하며, 아래 판매대는 미국의 코카콜라와 한국의 신라면, 연변의 ‘장백산(백두산)’ 담배 등이 중국의 여러 상품과 혼합돼 상점의 벽화와 함께 반세기 동안 조선족이 거쳐 온 시대의 기억을 진열한다.

심학철은 20여 년 동안 <기억연변> 시리즈를 진행해오며 연변에서 한민족의 전통이 사라지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중국의 한족에 동화돼가는 조선족을 직면해왔다. 작품 ‘화룡시 두도진’(2004)과 ‘연길인민공원’(2018)에는 그러한 변화에서 느끼는 작가의 애잔한 정서와 위기감이 각각 사적이고 공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초상을 통해 표현됐다. 작품 ‘화룡시 두도진’은 연변 조선족의 전통적인 함경도 식 가옥 내부로,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이 부뚜막과 방바닥이 이어진 정주간(晸廚間)에 선 노부부의 초상이다. 금세라도 주저앉을 듯 굽은 허리를 간신히 펴고 서 있는 노부부의 뒤편에는, 아궁이가 개폐식 쪽마루 아래에 들어앉고 가마솥이 놓인 전통 부엌과 서양식 케이크가 있는 식탁의 그림이 있다. 한족과는 다른 온돌과 좌식 등 조선족의 생활문화는 노부부의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동경을 담은 서양의 식탁 그림만이 허울 좋게 남을 태세이다. 또 다른 작품 ‘연길인민공원’은 연변에서 가족이 흔히 나들이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공원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초상이다. 색동저고리 한복을 곱게 입은 소년은 아메리카 대륙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선인장과 중국의 또 다른 상징인 판다의 가짜 조형물 사이에서 21세기 초 연변에서의 유년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 연변지역은 조선족의 수가 감소하고, 그 빈자리를 한족이 채우고 있다. 한민족의 전통적 가치와 문화로 형성된 조선족의 농촌사회는 붕괴하고, 젊은 세대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로 떠난다. 조선족학교에서조차 조선어를 점차 쓰지 않고, 중국사회에서 한족과 경쟁해야 하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중국어로 이야기하며 뛰어논다. 작가 심학철은 《기억연변》에서 연변 조선족의 과거와 현재의 기억과 기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걱정스러운 내일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물음을 건네받은 조선족 동포인 한국인은 같은 한민족임을 느끼면서도, 노동이주와 결혼이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을 향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답을 헤맨다. 연변 조선족의 초상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마주하는 것은, 민낯의 씁쓸한 한국인의 초상과 쓸쓸한 한민족의 역사이다.


 

심학철(Xuezhe Shen, 1973~)은 《간판이 있는 연변 풍경》(스페이스 빔, 2006)을 시작으로 《회색풍경》(연변대학예술학원, 2007), 《경계의 땅 두만강》(Zen Foto, 도쿄, 2012), 《기억연변》(예술공간 세이, 2015), 《경계의 땅-두만강》(혜윰갤러리, 2019), 《경계》(BMW Photo Space, 2019) 등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품집으로 『기억연변』(한미사진미술관, 2021)이 있으며, 고은사진미술과 상하이촬영예술센터, Zeit-FOTOSalon 등에 작품이 소장됐다.

정은정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중앙대 사진학과와 동대학원 순수사진(사진이론) 전공을 졸업하고 사진전문지 「포토넷」, 「VON」, 「사진예술」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3 서울사진축제; 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서울시립미술관), 《2016 영웅본색전》(문화역284)에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사진아카이브연구소와 램프랩에서 연구원으로 전시 및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사진센터(CCP)에 출강하며, 사진 리뷰어로 활동한다.

해당 기사는 2021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