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만 《대통령이 된 사람들》




겨울 청와대, 1998 ⓒ김녕만
 


 
오랜만에 흥미로운 사진전이 열렸다. 류가헌 갤러리에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보여주는 김녕만의 《대통령이 된 사람들》(22.2.8-22.2.20) 전시로 작가는 무려 40여 년 동안 이승만, 박정희를 제외한 10명의 대통령을 기록했다. 전시는 두 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공간이 1980년 전두환을 시작으로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까지 위대한 대통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통시적 전시라면, 두 번째 공간은 특별히 작가가 청와대 출입기자로 있었던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의 재임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공시적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언뜻 제목이 암시하듯이 대통령이 된 위대한 사람들의 영광스런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같이 보인다. 게다가 작가가 사건 중심으로 대통령 사진들을 연대별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전시의 동선을 따라가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매체를 통해 알려진 역사적 사건과 자신이 경험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역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아이콘임과 동시에 언제나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출두하는 전두환 전대통령, 1996 ⓒ김녕만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는 노태우 전대통령, 1995 ⓒ김녕만



 
우선 작가가 전시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권력에 관한 철학적 물음이다. 도록의 서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작가가 1979년 동아일보 새내기 기자 이후 오늘날까지 줄곧 대통령을 촬영하면서 경험한 것, 그것은 권력의 빛과 그림자에 관한 침묵의 성찰 즉 권력무상이다. 예컨대 절대 권력을 누리던 전두환이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릴 때 고개 숙여 밖을 내다보는 초라한 노인의 모습, 노무현 대통령 국장 때 그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침울한 거리의 추모객, 늦은 저녁 쓸쓸히 청와대를 떠나는 김영삼 대통령 등과 같이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취임 후 영광의 자리보다 초라한 퇴임이었고 화려한 의전보다 집무실의 텅 빈 공간이었다. 또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 역시 언론이 만든 대통령의 신화가 아니라 최고 권력 이면에 가려진 한 인간의 고독이었다.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 미국 태생, 1923-2004)이 전성기가 지난 노년의 당대 유명인을 촬영하면서, 또한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을 찍으면서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위장된 사진의 착시효과 즉 인간의 생물학적 진상(眞相)과 위장된 허상(虛像)의 폭로였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신화 또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물으면 아직도 앵무새처럼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최고 권력자의 이미지는 언제나 신화로 포장되어 오랫동안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고,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역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언론을 통해 여전히 절대 권력자와 유사한 이미지로 포장된다.

사실 한국의 대통령 사진은 관객에게 결코 좋은 이미지를 주지 않는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프랑스 태생, 1915-1980)가 ‘사진에 나타난 인물의 미래를 알고 있을 경우 응시자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푼크툼(punctum)을 경험한다’고 하듯이, 관객은 전-미래적인 관점에서, 전시된 사진들이 재임 시절 축복과 영광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퇴임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있거나 행사장에서 관계자와 악수를 하면서 눈은 슬쩍 미녀를 보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 미국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순간적으로 바지를 벗는 백남준, 거리의 지지자들 한 가운데서 열띤 지지를 호소하는 노무현 대통령 등은 사실상 의식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순간포착이다. 과연 이러한 장면들이 우연인가? 아니면 미리 예상된 조준 사격인가? 그것들은 작가가 처음부터 예상한 장면도 기획한 순간도 또한 연습과 반복이 만든 기계적인 행위도 아닌 말하자면 거의 반사적인 충동, 즉 시선의 무의식(vision inconscente)으로 포착된 장면들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 2009 ⓒ김녕만

 

서울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고 김대중 대통령 추모행사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형 인물사진에
시민들이 추모 리본을 빼곡하게 꽂았다. 2009년 ⓒ김녕만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는 김영삼 대통령, 1998년 ⓒ김녕만




 
순간포착은 셔터가 연동하는 기계적인 작동이지만 그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촬영자 자신의 감각적 판단 즉 결정적 찰나다. 이 순간들은 예견치 못한 대통령의 엉뚱한 장면들로 바늘 하나로 큰 얼음 덩어리를 결로 쪼개듯이 지속되는 시간 속 은닉된 카이로스(kairos)✽를 누설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원래 장인의 기막힌 솜씨를 말하는 카이로스는 소통을 위한 현장 다큐멘터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장르로서 분류된 다큐멘터리로 위장되어 나타날 뿐이다. 왜냐하면 카이로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달의 이면이나 바람에 날려 언뜻 보이는 양복 안감처럼 일상에 은닉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적인 눈으로 본 한국 대통령의 이면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던지는 의문은 권력무상의 명제로 ‘대통령은 어떻게 신화로 만들어지는가?’일 것이다. 작가는 어떠한 정치적 편견도 사회적 이슈도 없이 오로지 대상을 관조하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관객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사진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우리 모두의 딜레마 즉 허상으로서 위대한 대통령과 진상으로서 인간 대통령 사이의 모호한 갈등이며 나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의문이다. 결국 작가가 보여주는 대통령 사진들은 자신의 타고난 반사적 충동과 40년 이상 이어온 끈질긴 작가정신이 만들어낸 카이로스의 누설이다. 이 전시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집무실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김영삼 대통령, 1997년. 임기 말년의 고독이 느껴진다. ⓒ김녕만




청와대 앞뜰에 앉아 있는 김대중 대통령, 1999년 ⓒ김녕만


 
 


글 이경률 중앙대학교 사진전공 교수
해당 기사는 2022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