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 신화를 깨우다

 

LUCA31, 2021 ⓒ이정록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우주의 어느 별에선가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무를 가리켜 ‘우주에서 날아와 꽂힌 화살’이라고 표현한 어느 시인의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초록의 이파리 대신 생명의 등불을 달고 서 있는 나무를 상상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사진가 이정록은 무한대의 상상력과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처럼 우리가 잊어버린 신화를 이미지로 들려준다. 어쩌면 신화의 시대에는 나뭇가지에 영롱한 빛의 열매가 달리고, 아름다운 영혼들은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또는 성스러운 사원 주변을 줄지어 날아다녔을지 모른다. 이정록, 그의 사진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함께 체험해보자는 초대장 같다. “혹시 여러분, 꿈에서라도 이런 장면 상상해보지 않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이정록 작가(1971- )의 작품 앞에 서면 대부분 ‘이것이 스트레이트하게 촬영한 사진’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사진을 재현의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면 당연한 의문이지만 그러나 그의 모든 작품은 철저하게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대신, 촬영하기 전 단계에서 오랜 사전준비와 엄청난 수고를 지불해야 한다.

작가의 첫 발표작은 호남의 너른 평야를 보여주는 ‘남녘땅’이란 제목의 흑백사진이었다. 학부에서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운명적인 끌림으로 사진가를 꿈꾸며 대학원에 진학, 1998년에 석사 청구전으로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공부가 부족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졸업 이듬해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RIT)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다양한 표현의 실험을 통해 사진적으로 급성장하는 귀중한 시기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유학시절에 발표한 ‘Private Light’에는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단서가 들어 있다. 2002년 유학에서 돌아왔지만 사진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였다. 2003년에는 광주 신세계미술관에서 《아쿠아리움》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일민문화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받아서 1년간 근대건축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고, 이어서 ‘Glocal Site’라는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시간강사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그의 마음은 왠지 채워지지 않았다.
“충만하게, 도취되어 작업을 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그가 충실히 기록하고 재현하는 사진에서 그의 느낌을 표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보려는 사진으로 바뀐 것은 2005년 즈음이었다. 글로컬 사이트를 끝으로 사실적인 사진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Mythic Scape’를 촬영하기 위해 전북 고창을 자주 다닐 때였다. 한겨울이었다. 전에도 그 길을 지나다녔으련만 그날 유독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앙상한 겨울나무에서 생명의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순간, 그 신비한 느낌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촬영 후 암실에서 결과물을 보았을 때 그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으로 나타난 결과는 그저 평범한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착시였을까. 그 순간의 느낌을 사진으로는 전달할 수가 없는 걸까?”

그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 에너지, 생명력, 숭고한 느낌을 사진으로 표현해보려는 그의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가슴으로는 느낄 수 있지만 카메라의 기계적인 눈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그 지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가 다양하게 시도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로 인해 마침내 얻게 되는 데이터의 축적에 관한 기록은 지금 수십 권의 노트에 이른다.

 


Mythic Scape 07, 2007 Ⓒ이정록


Mythic Scape 13, 2007 Ⓒ이정록. 고창의 이 감나무가 “Tree of life”의 시발점이 되었다.


Tree of life #3-1, 2010 Ⓒ이정록


Tree of Life 6-2-3, 2017 Ⓒ이정록



자연이 말해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연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보잘 것 없는 물웅덩이를 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작은 벌레의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살랑거리는 물결, 특별할 것이 없는 풍경이라도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실은 첫 작업인 남녘땅도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기운,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거나 저녁 무렵 땅거미가 지는 시각의 뭔가 에너지가 안으로 응축되는 그런 내밀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었다. 광주에서 태어난 그가 서울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광주로 멀리 돌아온 긴 여정은 이제 작가의 작업도 본래의 것으로 돌아갈 것임을 예고하는 메시지였던 것 같다.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 자연이 갖고 있는 에너지, 전율이 느껴지는 장엄한 숭고미를 사진으로 옮겨보려는 그의 노력은 ‘Mythic Scape’ ‘Tree of Life’ ‘Decoding Scape’ ‘Nabi’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완성도를 더해갔다. 몹시 힘든 작업과정이었고, 때로는 목숨을 거는 위험한 순간도 뒤따랐지만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으로 그리던 작업을 수행해나갔다. 말 그대로, 충만하게 도취되어 작업을 해나간 것이다.

고창의 감나무를 계기로 나무가 갖고 있는 생명 에너지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그는 작은 불빛을 터트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미국유학 시절에 서치라이트를 이용해 촬영한 경험도 상기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서 시행착오는 되풀이되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을 때 누군가 “당신은 1000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군요.”라고 빈정대자 에디슨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나는 1000번을 실패한 게 아니라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 1000가지를 알아냈소.”

이정록 작가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사진이 되지 않는 이유를 수없이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하고서야 비로소 적정한 데이터를 알아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환경 속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촬영조건을 적용한다는 것은 자연과 호흡을 맞추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밤에 촬영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호숫가에서 또는 숲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가슴 벅찬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말한다. 달빛에 출렁이는 호수를 바라보거나 새벽에 호수를 덮는 안개에 젖어보는 그런 시간에는 자연과 소통하고 일체가 되는 행복에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행복감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담겼다.


 


Decoding Scape 01, 2011 Ⓒ이정록


Nabi 141, 2016 Ⓒ이정록



작업의 동력은 숭고체험
“신화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작용이 쌓이고 쌓인 결과물이었다. 객관적 시선으로 보니 나의 작업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고 내 안의 신성을 구체화하는 일이었으며, 원초적인 인간의 영역표시와 꽤 닮아 있었다. 그동안 내가 원시적으로 자연과 공명해왔음을 깨달았다.”

2007년, 서울과 광주에서 전시한 ‘Mythic Scape’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다. 그 후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던 그에게 문득 아직도 작업적으로 미련이 남은 고창의 감나무가 떠올랐다.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과 딱 일치되는 나무를 표현해보고 싶었고 이것이 ‘Tree of Life’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해나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작가는 고창의 감나무 촬영에서 플래시를 이용한 실험에 집중했다. 안개가 자욱한 캄캄한 새벽에 4x5카메라를 세팅하고 셔터를 연 후 플래시가 고정된 기다란 장대를 들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플래시를 나뭇가지 끝에 대고 신호를 주면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스태프가 플래시와 동조된 소형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그러면 장대 끝에서 플래시가 번쩍하고 발광했다. 그렇게 한 두 시간 동안 나무 주변에서 미리 계산된 동선대로 움직이며 플래시를 터트리다 보면 날이 밝아와 하루에 한 컷을 찍는 게 다반사였다. 그 과정에서 셔터스피드와 조리개수치 등등의 데이터를 쌓아갔다. 새벽 3시, 안개가 낀다는 소식만 들으면 광주에서 고창으로 달려가 작업을 진행하던 중에 조수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이 발생하고서야 일단 촬영을 멈추었다. 그동안 계절이 바뀌어 나뭇가지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이었다. 이렇게 열 번째 촬영에서 겨우 얻어진 작품이 그의 첫 ‘Tree of Life’가 되었고 이 사진은 에디션이 모두 판매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작업의 방향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와 다름없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Tree of Life’ 시리즈에 돌입하면서 이번에는 아예 마음에 드는 나무를 구해서 나주호 근처에 옮겨놓고 호수에 안개가 끼는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좀처럼 안개가 끼지 않았다. 청계천에서 스모그를 만드는 기계까지 사다가 안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별궁리를 다해보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높이 6m에 이르는 100평짜리 대형 창고를 구해서 실내촬영을 시도했다. 1년 동안 창고에 틀어박혀 안개와 소형 플래시를 이용한 촬영을 진행하면서 여러 점의 작품을 완성했고 촬영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이렇게 플래시를 이용한 촬영기법에 숙달되면서 그는 기호를 이용한 ‘Decoding Scape’와 ‘Nabi’ 시리즈도 시도했다.

“돌아보면 매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져요.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 스르르 이루어지기도 하고...”

제주 바다에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또는 아이슬란드의 화산지대,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 ‘Nabi’ 시리즈를 촬영하면서 그는 기적 같은 순간들을 체험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 관광지인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는 일몰 전에 퇴장해야 하고, 삼각대를 펼치고 촬영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는데, 그는 밤에 촬영해야만 하고 삼각대가 필수인 장노출 촬영을 하는 데다 작은 불빛을 터트리는 행위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물론 미리 허가를 요청하고 비용을 지불하지만 촬영하는 동안에도 총을 든 감시자가 단호하게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다.

“야간촬영을 허가받은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총을 든 관리인이 촬영하는 나를 말없이 빤히 쳐다볼 뿐 제지하지는 않는 거예요. 내가 너무 간절하고 절실해 보였나 봐요.”

대낮에 조심스럽게 오르내려도 아찔한 사원의 좁고 가파른 계단(성스러운 곳이니 기어서 올라오라는 뜻)을 소형플래시를 터트리며 어떻게 수없이 오르내렸는지, 아이슬란드 화산지대에서 낭떠러지 바위산 중턱의 좁은 길을 캄캄한 밤에 어떻게 오갔는지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와 생각하면 목숨을 건 일이었는데 그러나 촬영이 시작되면 무서움은 사라지고 날다시피 뛰어다녔다. 마치 혼을 빼앗긴 듯 도취되어 몰입한 결과 강렬한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 남았다. 비로소 진짜 그가 표현해내고 싶었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빛과 에너지
작가가 느낀 감정을 이미지화 하는 방법을 알아내자 콘텐츠가 다양해졌다. 자연의 숭고미를 보여주던 ‘Mythic Scape’와 ‘Tree of Life’를 지나면서 빛은 기호로 또는 나비로 나타났다. 신이 창조한 나무와 숲, 바다에서 사람이 만든 오래된 문명의 흔적으로 작업배경도 넓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Luca’에 이른다. 작가는 찰스 다윈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하나의 조상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 생명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그 존재를 루카(LUCA,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로 명명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마침 생명나무를 작업해온 작가로서 그는 생명의 기원과 그 폭발적 분화의 경이로운 순간을 나무와 사슴과 빛의 중첩과 얽힘과 도약으로 시각화 하면서 이 제목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제 생명의 빛을 찾아가는 작가의 작업은 생명의 기원, 그 뿌리로까지 뻗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록 작가의 작품연대기를 보면 그가 차곡차곡 작가로서 상상력을 시각화 해온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15, 6년 동안 치열하게 진행해온 그의 작업 후반부에 눈길을 끄는 시리즈가 있다. 그가 2018년에 광주비엔날레에서 발표한 ‘Private Sanctuary’ 시리즈다. 사적 경험에서 타인의 경험, 공적인 역사의 한 부분을 그 현장에서 받는 느낌대로 풀어가는 작업으로서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고문과 구타로 희생당한 시민들의 넋이 숨 쉬는 505보안부대와 국군병원, 그리고 더 나아가 제주의 4.3현장, 여순사건과 관련한 여수의 미래터널 등에서 지속광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무아지경으로 움직인 작품들이다.

이정록 작가, 그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타인의 기억이든 역사의 기억이든 모든 것을 빛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빛은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든 작품이다. 빛이 있음으로써 그 후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이 빛났고,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정록 작가는 그 빛을 이용해 무단히 신화의 저편을 보여주고 있다. “내 깃발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지금도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정록 작가. 언젠가 그 깃발에 꼭 닿기를 응원한다. 왜냐하면 그 깃발이 있는 곳이 어떤 세계일지 우리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Nabi 시리즈 중에서 Iceland 25, 2019 Ⓒ이정록


Nabi 시리즈 중에서 Santiago 23, 2019 Ⓒ이정록


남녘땅7, 1997 Ⓒ이정록


이정록(1971- )은 홍익대 대학원과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RIT)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1998년 첫 전시 《남녘땅》을 시작으로 《Mythic Scape》 《Tree of Life》 《Decoding Scape》 《Nabi》 《Mythical Gleams》 《The way》 《The origin of energy》 등 수십 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2021년 3월 9일부터 6월 27일까지 광주시립사진전시관 초대전으로 《그 곳, 그 숨》을 전시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