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 새벽을 열어 꽃을 피우다



화양연화, Flower 01, 2018-2021 ⓒ박상훈


화양연화, Flower 08, 2018-2021 ⓒ박상훈

화양연화, Flower 01, 2018-2021 Detail Image ⓒ박상훈



덧없이 소멸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꽃을 피우기도 하는 그런 씨앗 몇 개쯤,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살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가슴 속에 피우고 싶은 꽃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닐까. 1986년에 전시한 《우리나라 새벽여행》에서 새벽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박상훈 작가가 올가을 《화양연화》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누구에겐들 평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눈부신 시절이 없었을까. 하물며 들에서 홀로 피었다 지는 야생화, 7년을 기다려 허물을 벗지만 겨우 한여름 살다가는 매미 같은 곤충들에게도 화양연화는 있을 것인즉, 이번에 사진가 박상훈은 꽃이라는 피사체를 통해 이를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생명체의 화양연화란 가장 아름답게 활짝 핀 어느 한순간을 말함이 아니라 살아있음 자체, 즉 존재 그 자체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가슴 속 씨앗
박상훈 작가(1952~ )가 10여 년의 침묵을 깨고 올가을에 《화양연화》라는 전시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품어온 그의 씨앗 하나가 마침내 발아하여 꽃을 피운 것이다. 1982년에 《풍경모음》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86년과 94년에 연이어 《우리나라 새벽여행》이란 전시로 새벽을 놓치고 살던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 박상훈 작가. 30여 년을 패션사진가로 활동하면서도 개인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그가 10월 1일부터 31일까지 ‘갤러리나우’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 《화양연화》를 선보인다.

1976년에 사진과를 졸업한 이후 45년 동안 사진의 길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는 80년대 이후 오랫동안 가장 잘나가는 패션사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만 안주하지 않고 사진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풍경을 채집해나갔는데 그것이 초기에 《풍경모음》으로 나타났다. 그 후 바쁜 일정을 피해 새벽시간에 주로 촬영을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새벽여행》시리즈가 시작되었는데, 세상이 깨어나기 직전의 어둠과 새벽안개가 뒤엉켜 꿈속처럼 보이는 그의 사진 속 새벽풍경은 무척 신비롭고 신선했다. 일반적으로 사진가들이라면 기피하는 전봇대라든가 비닐하우스까지도 농촌의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그의 새벽사진은 오히려 삶이 풍경이 되고 풍경이 삶이 되는 진정성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던 것.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름다운 새벽풍경이 아니라 새벽이라는 감춰진 시간이었다. 보기 좋은 풍경을 넘어 농어촌의 있는 그대로의 새벽풍경을 통해 한국의 정서와 새벽이란 시간을 찾아냈다.

“풍경보다 시간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까요? 사실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새벽을 놓치고 살잖아요. 어쩌면 놓친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저의 새벽사진에 더 끌린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전시 이후로 제가 새벽전도사라도 되는 듯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저도 늦잠꾸러기였어요. 제가 부지런해서 새벽을 찍은 게 아니라 새벽을 찍기 위해 부지런했을 뿐입니다.”

새벽풍경을 찍되 풍경너머 새벽시간의 감성을 말하고자 한 것처럼 그는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줄곧 겉으로 드러난 형상의 저변에 깔린 더 본질적인 작가의 사유를 읽어주기를 바랬다. 2006년에 발표한 《Who are you?》도 그러했고 2010년에 발표한 《토르소》 또한 외형을 넘어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었다.

 


화양연화, People 01, 2018 ⓒ박상훈


화양연화, People 02, 2018 ⓒ박상훈


우리나라 새벽여행, 평창, 1985 ⓒ박상훈

우리나라 새벽여행, 부여, 1986 ⓒ박상훈


존재와 시간에 대한 질문
새벽을 통해 감춰진 시간을 보여주었듯이 작가는 유명스타들의 인물사진을 통해서도 가공의 최대치라고 말할 수 있을 스타의 외모가 아니라 그들의 민낯, 즉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Who are you?”라는 질문은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 더 나아가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향하는 질문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평범한 일반인처럼 수수하게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패션사진가로서 30여 년간 그들과 작업해오면서 쌓인 상호 신뢰와 작가 특유의 친화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인물사진은 더 나아가 《토르소》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의 토르소 사진에서 누드는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성의 영역인 머리를 잘라내고 몸의 중심만 보여줌으로써 보다 더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고자 한 작가의 의중이 담겨 있다. 특히 나무를 토르소로 보여준 사진이 독특했다. 나무 역시 몸통만을 프레이밍 함으로써 나무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유인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무사진에서 배경을 걷어내 선택과 집중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어요. 배경이 있으면 그냥 나무가 있는 풍경이 되어버리거든요. 배경을 걷어냄으로써 추상의 세계로 접근, 나무는 존재를 넘어선 하나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사람과 나무의 토르소에서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적인 면에 더욱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전에는 나무에 달린 꽃이나 이파리 등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지금은 디테일이 다 생략되고 아주 최소한의 것만 남은, 그 중심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의 토르소도 마찬가지여서 얼굴이 없는 몸은 오히려 존재에 대한 더 많은 상상력을 발동시킴으로써 진지한 소통을 시작하게 만든다.

“남들이 다 가는 장소를 찾아다닌다면 여행가이고, 남이 가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면 탐험가입니다. 작가는 탐험가라고 생각해요.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탐험가입니다.”

맨 처음에는 여행을 좋아해서 사진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박상훈 작가는 생각이 아주 많은 작가다.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할 때도, 완성된 후 전시를 하기까지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진촬영이 끝난 뒤 긴 시간을 묵히면서 작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촬영한 사진들이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지, 다른 의도로 찍었지만 시간이 지나 숙성되면서 전에 찍은 사진들과 서로 어떤 에너지를 주고받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직조하여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상상한다. 《토르소》 전시는 2006년에 사람을 먼저 찍었고 2010년에 나무를 찍었는데 이 두 시리즈가 통합되어 하나의 전시로 나타난 경우다. 그런데 이번에는 꽃을 먼저 찍었고 그다음 해에 사람을 찍었다. 2017년과 18년에 꽃을, 2018년에 사람사진을 찍어놓고 2, 3년간 숙성시키다가 올해 초에 초대전을 제시받고 백척간두에 선 절실함으로 고민을 했다고 밝힌다. 11년 만의 발표를 앞두고 자신의 허물을 벗는 고통을 겪으며 ‘꽃잎의 이슬이 화룡점정’이란 개념을 도입, 이번 작업의 마침표를 찍었다.


평범함에서 찾는 비범함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면 꽃을 찍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꽃 사진은 수없이 많고 흔하다. 따라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소재이면서 아울러 가장 차별화하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박상훈 작가의 눈에 그 흔하디흔한 꽃이 새롭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더라는 것.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서 비로소 꽃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던 걸음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전에 그 길을 수없이 지나다녔는데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이 쏠리면서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사진을 매개로 꽃과 대화를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깨달았어요. 전에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읽으며 명쾌하게 잘 썼다는 정도로만 지나쳤는데, 비로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고 한 시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 공감이 가는 거예요. 사진을 찍으며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니 알겠더라고요.”

2010년의 전시를 끝으로 몇 년 동안 다음 전시의 주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동네에서 가까운 봉은사를, 혹은 스튜디오 근처 도산공원을 산책하다가 자꾸 꽃이 눈에 들어온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와서 내가 꽃 사진을?”이란 생각과 동시에 “기존의 틀을 깨는 꽃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때부터 꽃 앞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꽃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연약하다고만 생각했던 꽃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하고 내게 특별히 다가오는 꽃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꽃을 유심히 살펴보니 개미가 기어 올라오기도 하고 매미가 떨어져 죽어있는 것도 보였다. 전엔 보이지 않던 작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라는 큰 개념에서 보면 꽃이나 벌레, 인간이 찰나의 존재라는 점에선 크게 다를 바 없고,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저 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론은 사람도 살아가면서 조명을 받고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면 빛을 발하듯이 꽃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조명을 주고 배경을 설치해주었다. 촬영이 다 끝난 다음에는 마지막 단계로서 완성된 사진에 이슬을 입히는 디지털 작업을 시도했다. 주삿바늘로 물방울을 떨어뜨려 인공적인 이슬을 만들어주니 이슬은 별처럼 혹은 우주의 한 공간처럼 보였다.

“아날로그 세대가 수없이 찍은 꽃 사진이 디지털 시대에 와서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접목시켜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작가의 이런 생각이 우주를 품고 있는 꽃 사진을 탄생시켰다. 누구나 찍는 꽃이지만 그는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아내는 작가의 눈으로 ‘박상훈의 꽃’을 피운 것이다.

 





who are you, 송강호, 2005 ⓒ박상훈 / who are you, 전도연, 2006 ⓒ박상훈


orso, tree 4, 2010 ⓒ박상훈




Location-화양연화 People 반포 한강공원, 2018 / Location-화양연화 People 잠원 한강공원, 2018


존재와 시간
1982년 첫 전시부터 40년이 흐른 2021년의 전시 《화양연화》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여러 소재로 다양한 사진을 발표해왔지만 결국 저변에 흐르는 공통된 이야기는 존재와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 보여주는 꽃 사진에서 화룡점정은 ‘이슬’이다. 그런데 이슬은 종종 덧없이 스러지는 짧은 한 순간에 비유된다. 새벽풍경도 그러하고 꽃의 한살이도 잠깐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시간과 반비례하는지도 모른다. 짧기 때문에 더 극적이고 찬란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해 사람의 일생은 상대적으로 길다고 해도 우주의 시간 앞에서는 이슬과 다를 바 없는 짧은 순간이다.

작가의 시간이야기는 곧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되기도 하고 존재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는다. 이번에 작가는 꽃을 통하여 한 송이 꽃조차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처럼 조명을 받고 특별한 기회를 부여받게 되면 빛나는 주인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화양연화는 나의 긍정의 힘이 응축된 제목입니다.”

작가는 2016년경 아주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다고 고백했다. 황망한 이별 뒤에 찾아온 상실감과 아쉬움은 생명에 대한 더 깊숙한 성찰을 이끌었고, 그것이 결국 꽃을 찍는 계기와 동력이 되었다. 존재함 자체가 화양연화임을, 시든 꽃도 아름답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서 그의 진정한 의미의 꽃 사진이 발아된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보내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더 깊이 느끼게 됐어요. 우주의 수많은 별이 신비한 게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신비였어요. 별은 나 이전에도, 나 이후에도 거기 있겠지만 내가 없다면 그 별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작가가 그냥 스쳐 지나갔으면 사라졌을 존재가 특별한 만남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듯이 우리의 가슴 속에 쌓여있는 씨앗들도 조건만 맞으면, 좋은 기회를 만나기만 하면 발아될 것이다. 따라서 내면에 무엇을 축적하고 있는지, 무엇을 품고 살아왔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장미는 장미꽃을 피우고 백합은 백합꽃을 피우듯이 우린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꽃을 피운다.

다음 작업을 묻는 질문에 작가는 “다음에 뭐가 발아될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이제부터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고 답한다. 사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는 박상훈 작가의 가슴 속에선 벌써 다음에 발아될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박상훈(1952~ )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1982년에 첫 전시 《풍경모음》 이후 1986년과 94년에 《우리나라의 새벽여행》, 2006년 《Who are You》, 2010년 《토르소》 등을 전시했으며 2021년 8번째 개인전 《화양연화》를 발표했다. 1992년 독일의 사진잡지 〈Photo Technique International〉에 소개되고 1994년에는 〈The New York Festivals〉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2015년부터 3년간 인천국제공항에 김환기 화가와 함께 한국을 알리는 작가로 선정된 박상훈은 모교인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