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운구 | 사진의 그때


박경리, 서울 정릉, 1976 ⓒ강운구


사진은 늘 ‘그때’를 가리킨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때’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진이 그때를 소환하고 추억하는 속성을 가진 것이라면, 올가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운구 사진전 《사람의 그때》(2021.9.11~12.26)는 가장 사진답다. 사진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동안 그가 촬영한 문인들과 화가를 중심으로 한 160명의 ‘그때’는 사진가 자신의 그때, 그리고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그때와 겹치며 저마다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다. 사진이 아니라면 불러낼 수 없는 그때의 강렬한 현장감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반은 너무 늙어버린 이분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자화상을 보듯 그분들의 그때를 들여다본다. 어찌 되었건 뒤돌아보는 그때는 늘 그립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정말 젊었으니까, 젊음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므로.

사진의 원칙
강운구 작가(1941~ )의 첫 사진은 빌린 카메라로 찍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에서 친구들이 바닷가 둑에 빙 둘러서서 둑 아래 낚시꾼들이 낚시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평범한 기념사진을 벗어난 그 사진은 교지에 실렸다. 물론 당시로선 평생 사진가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 산악반에 가입한 뒤부터 점차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60년대 초, 여행 자체가 생소하고 어렵던 시절에 소백산, 한라산 등으로 등산을 가면 자연풍경보다 오히려 산 아랫마을에 더 관심이 갔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오늘을 예견케 하는 그의 사진이 싹튼 셈이다.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사진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

강운구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진가가 되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대구사우회에 회원으로 초대되면서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66년에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되면서 직업사진가가 되었다. 그러나 주어진 사진을 찍는 일에 회의를 느끼던 그는 1975년 동아일보 출판국 사진기자를 끝으로 9년간의 신문사 생활을 마치고 1983년에는 프리랜서를 천명,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그동안 발표했던 “경주남산” “우연 또는 필연” “마을삼부작” “오래된 풍경” 그리고 최근의 “사람의 그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업의 실마리가 매체에서 일하던 시절과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기자든 프리랜서든 기록자로서의 시선과 시간성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그의 사진에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첫 시작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강운구를 평하는 여러 글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단어가 있다. 원칙, 고집, 자존심 같은 단어다. 한국사회가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천지개벽을 이루는 동안, 또한 사진에 있어서는 소박한 아날로그에서 표현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 사진으로 급변하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사진의 원칙과 삶의 자세를 지켜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를 원칙주의자 혹은 고집쟁이로 부르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가 초지일관 지켜온 것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미풍이 불건 태풍이 몰아치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고 나이테를 그리며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거목이 되었다.


 


김기창, 충북 청주, 1984 ⓒ강운구


천경자, 서울 압구정동, 1984 ⓒ강운구


사람의 그때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번 전시작 《사람의 그때》를 왼쪽으로 강, 오른쪽으로 산맥, 멀리 마주보이는 벽면에서 산과 강이 만난다는 콘셉트로 디스플레이를 했음이 보인다. 입구로부터 왼쪽 벽면으로는 문인들의 초상, 오른쪽 벽면으로는 화가를 비롯한 시각예술분야의 작가들의 인물사진이 펼쳐지면서 중앙벽면에서는 서로 섞이는 형식을 취했다. 20세기 중반, 예술과 인문학이 빈약하던 시절에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산이 되고 강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배치에 수긍이 간다.

《사람의 그때》는 1968년 함석헌 선생의 사진부터 시작하여 7, 80년대가 주를 이룬다. 한 인물을 여러 차례 찍었을지라도 가능하면 가장 오래된, 그분들이 가장 젊었을 적 한창때를 보여준다는 기준으로 사진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160명의 예술가의 인물사진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 그 많은 사람을 만나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약 500명에 이르는 인물사진 중에서 문인과 시각예술 분야로 범위를 좁혀서 발표한 것이라고 하니 이 결과물은 시간과의 싸움이고 각 분야를 넘나든 만남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징표라고 하겠다. 이를 두고 작가도 “이 모든 분과의 인연이 고맙다.”고 말하며 한편으론 이렇게 자문했다. “사람은 대체 한평생 몇 명이나 만날까?”

“사람이 산다는 게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 사진들 중에는 문학, 미술잡지의 의뢰를 받아 찍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은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만남을 사진으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물사진을 찍으며 나름대로 규칙을 정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가능하면 그 인물이 관장하는 공간에서 찍는다는 것인데, 공간이 그 인물을 말해주는 기호가 되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 놓여 있는 책이나 그림, 소소한 물건들은 그 인물을 설명하는 배경이 된다. 물론 공간은 그 인물이 관장하는 곳이지만 그 공간을 어디까지 보여주고 프레이밍 할 것인가는 사진가의 몫이다. 다른 하나는 사진가가 이래라저래라 연출하지 않고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지나치게 카메라를 의식하거나 긴장하여 부자연스럽거나 과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것도 그 사람의 성격이고 기질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인물사진에서 사진가가 져야 그 사람다운 사진이 나온다.”는 그의 말은 사진가의 의도를 앞세우려 하기보다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기록성은 사진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기록만 목적으로 하면 재미없거나 빤한 사진이 되어서 지루하죠. 그래서 각각 다른 뉘앙스를 풍겨야 하니 어려워요.”

사실 기본은 대체적으로 재미가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건 기본이다. 그는 “강운구 사진론”이라는 저서에서 “쌀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는 밥이다.”라고 말했다. 기록사진이야말로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 밥과 같다는 의미다. “사람의 그때”가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양주혜, 서울 한남동, 1989 ⓒ강운구



황석영, 서울 영등포, 1977 ⓒ강운구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1994년에 학고재에서 열린 《우연 또는 필연》이 첫 개인전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 전에 “내설악 너와집”(광장, 1978) “경주남산”(열화당, 1987)이란 사진집을 출간하긴 했지만 왕성한 작업량에 비한다면 쉰이 넘어 첫 전시라니 참으로 의외였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진즉부터 ‘내 손으로 내 사진을 발표하는 전을 펴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것을 지킨 것뿐이다. 그것이 그에겐 사진가의 자존심이었다. 물론 모두에게 통용될 필요는 없지만 그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생각을 고수해오고 있다.

그가 간간이 발표한 사진집과 전시를 통해 본 그의 사진은 시골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 불교문화를 포함한 우리 문화유산, 인물사진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삼부작”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산업화 이전의 농촌에 대한 기록으로서 소박한 대상에 어울리는 소박한 접근으로 그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사진가의 선입견, 또는 사진가의 사진꺼리에 대한 욕심이 배제된 그 당시 그러했던 모습 그대로다. 또한 “경주남산”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화유산 기록은 그의 인문학적 지식과 사진적인 안목이 순조롭게 어울리면서 다시 보기 어려운 걸작을 만들어냈다. 벌써 30년을 훌쩍 넘긴 이전의 기록이니 지금 그 자리에 온전히 남아 있을지 의심되는 불상도 있고, 1년에 딱 며칠, 긴 빛이 들어올 때만 디테일을 찍을 수 있는 어두운 굴 속 불상 등, 우리의 육안으로 보기 힘든 장면을 남겼다. 그리고 이번에 집대성된 예술가들의 인물사진 역시 사진이 아니라면 다시 만날 수 없는 한 시대의 초상을 보여준다. 사진집 서문에서 박상순 시인은 ‘시대의 흔적을 넘어서는 불멸의 초상’이라고 평했는데, 인물사진으로써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그리고 여전히 치열한 작업을 하고 있는 생존 작가들의 한 순간을 통하여 그들의 존재증명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증언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거칠게 나눈 세 가지 유형의 사진들은 카메라 앞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일 뿐, 대상에 대한 접근이나 해석, 목적 등에선 상통한다. 그는 동시대의 가까운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시간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그것이 결국 쌓이면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그의 사진들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으로 남았다.

“우연을 우연으로 흘려보내느냐, 필연으로 귀속시키느냐는 작가의 선택이며 의지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장면에 부딪치잖아요. 이 만남이 그냥 의미 없이 흘려보내면 우연에 그치고 말지만 그 순간을 선택하여 기록으로 남기면 필연이 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놓치지 말아야죠.”

그 순간을 찍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가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 그래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진가의 책무다. 그는 그 책무를 50년 넘게 수행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코로나 직전까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중국, 러시아, 몽골에 걸쳐있는 알타이 산맥의 여기저기를 해매 다니며 작업한 암각화 작업이 그것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찍으며 가졌던 의문, 왜 고래는 세로로 서 있을까 같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문헌을 찾아보던 그는 문화적 흐름이 비슷한 중앙아시아의 암각화는 어떤 그림일지 찾아 나섰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많은 암각화를 촬영,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고 말했다. 암각화 중에서 사람을 묘사한 그림만 찾아서 찍었다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선사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고고학과 사진으로 추적하는 희귀한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암각화는 흑백으로, 중앙아시아 사람과 풍경은 컬러로 찍었다. 결국은 국내에서의 작업 “마을삼부작”처럼 사람들의 삶과 풍경, 그리고 “경주남산”처럼 암각화를 찍음으로써 그의 작업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인호, 서울 신사동, 1976 ⓒ강운구


김지하, 강원 원주, 1984 ⓒ강운구


주명덕, 서울 정릉, 1971 ⓒ강운구



글과 사진의 합일
강운구 작가는 사진집 외에도 평론집 “강운구 사진론”과 산문집 “시간의 빛”, 그리고 신문과 잡지의 칼럼을 통해 수려한 문장을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항상 군더더기가 없고 정확하여 날카롭지만 단정하다. 한 글자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려는 엄격함과 우물쭈물하지 않는 솔직한 문장이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과 일치한다. 자신에 대한 부단한 성찰과 단련이 없다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점이 후배들이 그를 따르게 하는 일면일 것이다.

사실 사진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사진읽기에는 모호함이 개입되지만 글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준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전개, 문장부호 하나에서도 글쓴이의 정신과 심리와 호흡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강운구 작가는 글에서든 사진에서든 정직하고 확실하며 꾸밈과 과장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강운구다움’을 견지한다.

지금 코로나로 한 자릿수의 만남만 허용되는 시기에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에는 사진가 강운구의 부름을 받은 160명의 예술가가 모였다. 저마다 글과 그림, 사진과 디자인 등으로 한 시대를 일깨우며 풍요롭게 해준 인물들이 해후했으니 서로 할 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사진이 참 흥미롭다. 1980년대에 북한산 바위에 웃통을 벗고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름 모를 동양화가(?)의 뒷모습이다. 유명인들 사이에서 ‘미상’으로 표기된 이 사진, 이름을 모르니 굳이 책에 넣지 않아도 될 이 사진을 넣은 의도를 숙고해본다. 하긴 이름이 있거나 없거나 누군들, 그때가 소중하지 않으랴. 강운구 작가의 사진론을 김종길 시인의 시, 〈사진〉으로 대신한다.

 

사실에만 충실하다고 해서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저 빨랫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헌 옷가지들이 받는
따스한 저녁 해를

무엇이 이토록 참답게
기록하고 보존해주랴.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1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