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석 | 한국전쟁과 분단에 대한 고찰

 

동두천 기념사진 ⓒ강용석

작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사진학과 4학년 학생이던 1983년에 동두천 흑인거리에서 1년간 작업한 사진들이 이후 그의 평생 작업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을. 백제예술대 강용석 교수는 학창시절 기지촌 작업 이후 일관되게 한국전쟁의 후유증과 분단의 아픔에 천착해왔다. 앞의 작업이 그다음 작업을 끌어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분단작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수동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그의 끈질긴 관심과 노력이 집중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두천, 매향리, 한국전쟁기념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부산을 사수하라 등, 40년 가깝게 이어진 그의 작업은 이 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이었다. 사진은 기록성을 넘어서 서정성, 예술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믿는 사진가 강용석. 그가 초지일관해온 40년 사진세계를 만나본다.

기지촌 사진사
기지촌이라고 불리던 경기도 동두천의 미군부대 주변은 대한민국 속 미국이었다. 스물을 갓 넘긴 사진학과 학생 강용석은 이국적인 분위기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으로 동두천을 찾았다. 그 이전에 서울에서 이태원 미군기지를 촬영한 적이 있었지만 동두천은 미군기지로서는 최전방이고 낙후되고 거칠었기 때문에 촬영을 위한 용기가 더 필요했다. 1982년부터 주말마다 동두천을 찾아갔지만 처음에는 그저 멀리서 훔쳐서 촬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년 이상 들락거리다보니 그곳의 분위기를 파악하게 되었고 따라서 1년 동안은 아예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흑인거리의 사진사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미군기지 영내는 출입할 수 없지만 그 주변에 백인거리와 흑인거리가 따로 있고 그들이 드나드는 클럽이 있거든요. 그 클럽을 내국인은 들어갈 수 없는데 사진사는 출입이 허용되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던 사진사가 일을 그만두자 주저 없이 그 일을 맡아 1년간 클럽에서 그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가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는 광고대행사에 취직했는데 얼마 안 되어 그만둬버리고 아예 동두천에 방을 얻어 사진사가 되었다고 하니 부모님과 주변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워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을까. 사진 한 장에 1달러를 받고 클럽에서 미군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그는 미국에 대한 한국의 의존성, 한국전쟁이 낳은 비극의 실체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기지촌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가서 살겠다는 막연한 동경 때문에 기지촌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결혼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설사 미국에 간다 해도 폭력에 시달리거나 버림받기 일쑤인데 80년대만 해도 미국에 대한 순진한 환상이 컸던 것이다.

“대부분 ‘내국인 출입을 금함’이라는 경고판이 붙은 동두천 보산리라는 작은 동네의 술집에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나는 기념사진으로 찍었지만, 지금 이 사진들이 그들의 마음에 추억이 담긴 그리운 기념사진으로 자리할까요?”

미군과 기지촌 여성들을 1년간 촬영한 그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앙대 대학원 졸업 후에 다시 미국 오하이오대학교(OU)에 입학하는데 그의 동두천 기지촌 사진을 본 학교 측에서 흔쾌히 입학을 허가했다고 한다. 기지촌 작업은 미국유학의 디딤돌이 되었고, 귀국하여 백제예술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매향리 작업을 시작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기지촌 작업이 20대 청년의 열정에서 빚어진 한국전쟁과 분단사진의 출발점이었다면 1995년부터 시작한 “매향리” 작업은 분단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뚜렷이 드러나는 작업이었다.


감정을 배제한 중립적 시각
20대 초기 작품이 대부분 강렬하고 원근감이 깊은 화면에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박함이 시선을 붙잡는다면, 30대 중반 이후 매향리 미군 폭격기 사격훈련장을 촬영한 “매향리 풍경”에서는 감정의 톤을 한껏 낮추고 매우 중립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몹시 폭력적인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은 밝은 톤으로 비극적 감정이나 울분을 날려버리고 냉정하게 오래도록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서해안의 작은 어촌인 매향리. 그리고 그 갯벌로부터 2km 정도 떨어져 있는 ‘농섬’. 별다른 일이 없다면 바닷바람이 불고 갈매기가 날고 갯벌에서 어민들이 어패류를 채취하거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고 수평선 너머로 붉게 떨어지는 낙조를 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평온한 곳,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52년부터 수십 년간 미군 폭격기가 이곳에서 사격훈련을 실시하면서 날마다 무서운 굉음에 시달리고 해안에는 탄피들과 불발탄이 나뒹구는 폐허로 변했다.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분단 상태지만 매주 실시되는 미군의 폭격연습으로 매향리 일대 해안과 농섬은 여전히 폭격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강용석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나는 ‘매향리 풍경’을 통해서 단순히 현재의 한반도의 상황이나 전쟁, 그리고 고통만을 담으려 의도하지는 않았다. 1984년 ‘동두천 기념사진’에서는 사진에 포함된 소재들과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기지촌 냄새가 풍기는 색을 통해서 전쟁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한 지역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드러냈다면, ‘매향리 풍경’ 사진에서는 지형과 풍경을 감싸는 공기(空氣), 그리고 그것이 사진의 중조 톤(gray tone)으로 변환되는 것을 통해서 개인적인 의도를 드러내려 했다.”고 밝힌다.

작가는 매향리라는 서해안 작은 마을이 갖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와 중조 톤이 갖는 사진적 의미, 즉 감정에서 벗어나 냉정한 접근으로 그 의미를 파악해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조 톤의 사진적 의미는 거리두기인데, 과거의 많은 전쟁 사진에서 볼 수 있었던 감상주의와 감정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사진의 기계적 장치와 광학적 특성에 의존하여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자 했다는 것. 사실 피사체 자체가 불발탄 같은 강렬한 대상이어서 지나친 감정몰입을 줄여보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거리를 두고 무심한척 촬영한 사진 가운데 기다란 불발탄 몇 개가 해안의 모래밭에 나란히 놓여 있는 장면은 얼른 보면 마치 상어가 바다에서 해안으로 올라와 휴식하고 있는 모습 같다. 또한 목표물로 설치해놓은 폐차는 정확한 타격으로 형체가 뭉그러져 있는데, 전쟁오락게임 화면 속 대상물처럼 무심을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놀이 같은 훈련이 만약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 비참한 현실은 누구의 몫이 되겠는가. 작가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었던 남북한의 전쟁이 과연 우리만의 전쟁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감정적 개입 없이 그 비극성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통선 풍경 ⓒ강용석


선전촌 사진 ⓒ강용석


매향리 풍경 ⓒ강용석

매향리 풍경 ⓒ강용석


분단이 만든 낯선 풍경
“매향리 풍경”이 잔잔하다면 민통선 내에 있는 선전촌과 방호석을 찍은 사진들은 낯설고 기이한 풍경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가는 길에는 양쪽으로 마치 고인돌처럼 바윗덩어리가 포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의 탱크가 전진하지 못하도록 돌을 굴려 길을 막으려는 일명 ‘방호석’이다. 따라서 그 돌은 평소에는 쉽게 굴러떨어지면 안 되지만 유사시에는 어렵지 않게 돌을 밀어 떨어뜨릴 수 있어야하므로 절묘하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일촉즉발의 한반도 상황 같이 보인다.

민통선 내 선전촌도 그러하다. 철원에 있는 이 선전촌은 북한 땅 오성산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역이다. 북한의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을이므로 당연히 그들의 시야 안에 잘 들어와야 하지만 적의 시야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성립된다. 쉽게 굴러떨어지지 않아야 하면서 쉽게 굴릴 수 있어야 하고 적의 시야 안에 있으면서 안전해야 하는 이중적 조건을 감내하는 기이한 풍경이다.

“매향리 작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마침 우리 사진과에 철원에서 온 학생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가 선전촌에 사신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나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는 그곳을 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예요. 주민을 면회하러 들어갈 수는 있거든요.”     
백제예술대가 있는 전주에서 강원도 철원까지 보통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 길을 주말마다 오가는 민통선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2000년부터 6년 동안 그 먼 길을 오가며 선전촌과 방호석을 촬영했고, 아직도 전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우리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비무장지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전쟁의 상흔을 들여다보면서 주목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기념비’였다.

“우리나라에 한국전쟁기념비가 이렇게 많은 줄을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관심이 없어서 보이지 않았나 봐요. 사진을 찍으려고 찾아보니까 웬만하면 전국 곳곳 도시마다 다 있더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수십 년 세월에 도시들이 대개 다 확장되다보니 그 기념비들이 대부분 외곽으로 밀려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는 거예요.”

냉전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의식에서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증이 약화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까. 수많은 전쟁기념비가 의미를 잃고 망각되어가는 모습이 사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나는 이러한 전쟁 기념비들을 통해 긴장의 역사를 보고, 현재의 현실을 통해 이완의 풍경을 다시 본다. 이것은 근현대사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집단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작업의 끝 무렵에 작가는 전북 고창에서 ‘민간인 학살 위령비’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의 영웅을 미화하는 기념비와 대조적으로 이데올로기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기념비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 작업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졌다.(p.38) 당시 각 대학 고고학과에 민간인 집단학살의 현장을 발굴케 하는 프로젝트가 주어졌는데, 정부가 바뀌면서 중단되는 바람에 그의 작업 역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전쟁 기념비 ⓒ강용석


부산을 사수하라 ⓒ강용석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강용석



부산을 사수하라!
2015년에 부산 고은미술관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부산참견록” 프로젝트의 작가로 선정되었을 때 그가 부산을 한국전쟁의 마지막 보루, 피난처로 초점을 맞춘 것은 그간 오랜 작업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가 붙인 자못 비장한 제목, “부산을 사수하라”는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미국인 작가가 쓴 책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원조는 낙동강 전선을 지키며 비장한 각오로 “낙동강을 사수하라”고 외친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마지막 보루인 부산이 점령당하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부터 65년이 흐른 2015년의 부산에서 사진가 강용석은 무엇으로 전쟁의 기억을 상기할 것인가. 작가 자신도 전후세대이고 사실 부산이란 도시 자체도 직접적으로는 전쟁을 겪지 않은 후방의 도시다. 그러한 부산에서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강용석 작가는 이미 전쟁발발 65년이 지난 부산에서 전쟁을 연상시키는 촬영을 시도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것들, 전쟁 직전까지 내몰렸던 당시의 공포감과 두려움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유난히 벽화와 동상에서 피난민을 그려낸 것들이 많은 것을 찾아내기도 했고, 풍요 뒤 빈곤에 드리운 그늘에서 오래전 상처를 읽어내기도 했다.

“사실성을 제외하고도 다른 스토리를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산 작업에서 시도해보았어요. 사진이 주는 느낌만으로도 문맥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1980년대 로버트 아담스가 핵무기 제조공장 옆 마을사람들의 표정과 제스처만으로 핵무기의 공포를 전달해주었듯이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풍요를 누리는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을 새삼스럽게 전쟁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강용석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온통 전쟁과 분단을 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전쟁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촬영이 잠시 정지되었지만 앞으로, 특히 정년퇴임 후 더 열심히 작업하기 위해 2019년에 전주 외곽에 작업실을 지은 강용석 작가는 여전히 암실에서 흑백작업을 하고 있는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내가 잘 구사할 수 있는 것이 흑백”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는 사진 만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퇴화해가는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 그러나 여전히 엄중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슬픈 현실이 앞으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 될지 궁금하다.


강용석(1958- )은 중앙대 사진학과와 대학원, 미국 오하이오대학교(OU)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3년부터 백제예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 서울과 부산에서 “매향리 풍경”을 전시했고 2003년에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2000년 “동두천과 매향리”, 2009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한국전쟁기념비”, 2016년 부산 고은미술관에서 “부산참견록_부산을 사수하라” 초대전을 열었다. 2010년 동강사진상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동강사진박물관, 한미사진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1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